나이키의 전신 블루리본 스포츠의 탄생(1964~1969)
1957년 육상선수였던 필 나이트(나이키 창업자)는 대학교에 들어가게 되면서 코치 빌 바우어만을 만난다.
두 사람은 공통 관심사가 있었는데, 바로 운동화였다.
‘필나이트’는 당시 미국의 운동화 시장을 독점하고 있었던 독일제(아디다스)가, 일본의 저렴한 가격대의 기능성 운동화로 대체되고 선수들의 기록 향상을 시킬 수 있을거라 생각했다.
1964년 1월25일, 경영대학원을 졸업 후 코치 빌 바우어만과 함께 선수들에게 고품질의 신발을 공급하자는 목표를 세우고 1964년 미국 오리건주에 각각 500달러를 투자하여 나이키의 전신인 ‘블루 리본 스포츠’를 설립한다.
이들은 일본의 오니츠카 타이거( 지금의 아식스)로 부터, 미국 내 독점 판매권을 획득하면서,신발 200켤레를 들여와 미국에서 판매하기 시작했다.
예상대로 인기가 많아 매출은 계속 증가했고,첫해 약8천 달러(지금의 10억정도), 이듬해 1969년에는 30만 달러의 매출은 달성하게 된다.
1965년 필 나이트는 스탠포드 대학원 동기이자 육상 선수였던 제프 존슨을 고용해 회사의 관리 업무를 맡겼다. 필 나이트가 고용한 나이키 최초의 직원인 제프 존슨은 블루 리본 스포츠의 마케팅 소재를 개발하거나 홍보 책자를 제작하였고, 어느날 꿈에서 떠오른 이름을 추천하였는데 그 이름이 바로
‘나이키’다.
2) 나이키 브랜드의 탄생과 기술력(1970~1979)
1970년 빌 바우어만은 와플 굽는 기계에서 착안해 새로운 고무 스파이크(Spike, 미끄럼 방지 패턴이 들어간 운동화 밑창)를 개발했다.
와플 제조기에 액체 고무를 부어 만든 고무 스파이크가 장착된 운동화는 기존 운동화에 비해 가벼우면서도 지면과의 마찰력이 강하다는 특성(미끄러움 방지와 추진력 향상)이 있었다. 빌 바우어만은 이 기술의 이름을 와플솔(Waffle Sole)이라고 정했다.
1972년 빌 바우어만은 자신이 개발한 와플솔을 활용해 코르테즈라는 운동화를 개발해 시장에 선보였다.
1972년부터 블루 리본 스포츠가 독자적인 제품을 생산하면서 오니츠카 타이거사와의 관계는 악화되면서, 협력 관계를 종료하고 독자적인 브랜드 ‘나이키’를 만들게 된다.
나이키 로고의 탄생
나이키(스우시)는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로고중 하나이다.
하지만 퍼포먼스,원칙,혁신,불규칙,창의성 그리고 변화를 대표하는 상징인 이 전설적인 로고는 생산주기를 맞추기위해 단35달러에 디자인과 학생에 의해 12시간만에 만들어졌다는 사실.
1971년 새로운 브랜드인 나이키의 로고 디자인이 필요했던 ‘필 나이트’는 포틀랜드 주립대에서 그래픽 디자인과 학생인 ‘캐롤린 데이비슨’에게 디자인을 맡겼다. 캐롤린 데이비슨은 다양한 버전을 만들어 제시했고, 여러 옵션이 거절된 후 필 나이트는 마지못해 그리스 로마의 승리의 여신인 ‘니케의 날개’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한 로고를 최종 선택했다.
“음, 썩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점점 익숙해지겠지요.” (필나이트)
이 로고 디자인이 나이키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스우시(Swoosh, 휙 소리를 내며 움직인다는 의미)’였다. 당시 ‘필 나이트’는 ‘캐롤린 데이비슨’이 디자인한 것들이 전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멕시코 공장에서 회사 로고가 결정되지 않아 신발을 생산하지 못하던 상황이어서 마지못한 분위기로 최종 결정됐다.
코르테즈 개발 이후, 빌 바우어만은 나이키의 첫 번째 운동화를 신고 올림픽에 출전할 선수를 찾았다. 빌 바우어만은 자신의 제자이자, 장거리 육상경기 7종목에서 미국 신기록을 보유하고 있던 육상 선수 스티브 프리폰테인을 최초로 후원했다. 이후 나이키는 자사의 제품을 육상 선수들에게 지속적으로 후원했다.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에 출전한 육상 선수 스티브 오벳은 나이키 운동화를 신고 신기록을 세웠으며, 1983년 여자 마라톤 경기에 출전한 마라토너 조안 베노이트 사무엘슨도 나이키 운동화를 신고 세계 신기록을 세웠다.
1970년대 말에 나이키는 미국 항공 우주국(NASA)직원이었던 프랭크 루디(Frank Rudy)와 함께 두꺼운 재질에 압축 공기를 주입해 일정한 압력을 가하면 자연스럽게 눌려지는 ‘에어 쿠셔닝’ 기술을 개발했다. 1979년 나이키는 이 기술을 활용해 와플 솔 기술과 에어 쿠셔닝 기술이 적용된 테일윈드를 출시했다.
1970년대 미국에 조깅 열풍이 불면서 운동화를 전면에 내세웠던 나이키는 빠른 속도로 성장할 수 있었고 , 이후 나이키는 미국의 스포츠 신발 및 의류, 용품을 대표하는 선두주자가 된다.
3) 마이클 조던과 후원 계약 체결 이후(1980~)
나이키는 1980년대 중반 미국 시장에 불어온 에어로빅 열풍을 예측하지 못해 에어로빅 슈즈를 출시한 리복(Reebok)에게 선두자리를 내주었다. 1982년 에어쿠셔닝 기술을 도입한 최초의 농구화 ‘에어포스1’ 발매하고, 1984년드디어 나이키의 전설이될 한 인물과 만나게 된다.
바로 NBA(National Basketball Association, 미국 프로농구)의 시카고 불스(Chicago Bulls)팀 소속이었던 신예 선수 마이클 조던과 농구화 및 의류에 대한 후원 계약을 체결하게 된다.
당시 재정이 부족했던 상황임에도, 신예 마이클조던에게 50만 달러를 제시했고, 1985년 나이키는 마이클 조던을 위해 ‘에어 조던 1’을 개발했다. 이후 마이클 조던이 ‘에어 조던 1’을 착용하고 레이를 하면서 80년 후반부터 엄청난 기세로 성장하게 된다.
1988년 나이키는 일반 사람들에게 조깅을 해야 하는 육체적 · 정신적 동기를 부각시키기 위해 ‘저스트 두 잇(일단 해봐!라는 의미)’ 광고 캠페인을 시작했다. 이 광고 캠페인의 감성적인 접근은 소비자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었고, 나이키가 운동화는 물론 스포츠 의류사업을 대표하는 브랜드로 성장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GIPHY App Key not set. Please check settings